정보화마을 서귀포 무릉도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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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초 모동장(毛洞場) 우장(牛場)으로 목감(牧監) 또는 목자(牧子)들이 기거하였으며 취락이 형성된 시기는 1830년경으로 추정됨.

    1910년 국유목장을 민유로 이관하고 그후 1914년 일본인에 의한 세부측량결과 3개동(좌기, 인향, 평지) 전지역이 무릉경(武陵境)으로 귀속되었으며, 사기수(蛇起首)를 좌기동(坐起洞)으로 고바치를 평지동(平地洞)으로 인향리(仁鄕里)를 인향동(仁鄕洞)으로 개칭하고 무릉리(武陵里에) 편제되었다가 인구증가에 따라 1920년 무릉 1, 2리로 분할되었음.

    각동의 설촌은 각기 다르며 인향동이 1768년 도원리(挑源里)에서 중장리(中障里)로 분리 독립되었다고 전함.

    무릉 2리의 형성과정(形成過程)

    모동장(毛洞場)의 유래(由來)

    본주(本州)의 목장(牧場)은 옛날 칠소(七所)였으나 그 뒤 20소(所)로 되었다. 숙종(肅宗) 30년(1704) 목사(牧使) 송연규(宋延奎)에 의하여 조정(朝廷)에 품의(稟議) 목장(牧場)에 축조(築造)하고 20소(所) 60둔(屯)을 합하여 10소(所)로 지정 1, 2, 3, 4, 5, 6소(所)는 주(州)에 예속(隸屬)시키고 7, 8소(所)는 정의현(旌義縣)에 속하게 함.
    숙종(肅宗) 33년(1707) 목사(牧使) 이규성(李奎成)이 말 100여필을 사서 1, 8호(號)에 분방(分放)함. 따라서 마장외(馬場外) 목장(牧場)으로는 1소장(所場) 내의 황태장(黃泰場), 10소장(所場)내의 천미장(川尾場), 대정(大靜)의 모동장(毛洞場), 가파도(加波島)의 흑우장(黑牛場)이었으며 고장(羔場)은 우도장(牛島場), 비양장(飛揚場), 송악산장(松岳山場)이 있었음.
    영조(英祖) 21년(1745) 목사(牧使) 윤식(尹植)이 조정(朝廷)에 품의(稟議) 가축(加築)하고 마우감목(馬牛監牧)을 정하여 목양(牧養)토록함.
    목장(牧場) 7소(所)는 안덕면경(安德面境) 주위 40리(16㎞)이며 목장(牧場) 8소(所)는 중문면경(中文面境) 주위 30리(12㎞)에 마감(馬監) 2인, 군두(群頭) 2인, 목자(牧者) 24인에 둔마(屯馬) 190필이었음.
    가파도장(加波島場)은 영조(英祖) 26년(1750) 목사(牧使) 정언유(鄭彦儒)에 의하여 가파도(加波島) 주위 10여 리(4㎞)에 흑우장(黑牛場)을 설치 50두(頭)를 방목하여 진공우(進貢牛)를 사육중 헌종(憲宗) 6년 9월(1840) 영국함대(英國艦隊)가 가파도 해안에 정박하여 대포로 인축(人畜)을 살상하고 소를 약탈(掠奪)하여 진공우(進貢牛) 사육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모동장(毛洞場)으로 옮겨 흑우(黑牛)를 합둔(合屯)하였다.
    모동장(毛洞場)은 무릉 2리 주위 37리(15㎞)(동-인향동 근경, 서-신도리 농남봉 1.5㎞ 지점, 남-영락리 독구못 동네 500m 지점)에 마우감(馬牛監) 각 1인, 군두(群頭)1인, 목자(牧者) 18명을 두어 700여두의 소와 말을 함께 방목하고 관리되어 오다가 자연폐사(自然斃死) 등으로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으므로 1800년대말 7소장(所場)으로 이식(利殖)되었다고 함.

    설촌(設村)

    현재 행정상의 무릉 2리는 인향동(仁鄕洞), 좌기동(坐起洞), 평지동(平地洞) 등 3개동으로 편제되어 있으나 동별(洞別) 설동(設洞) 연대는 각기 다르다. 즉, 설촌(設村)한 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인향동(仁鄕洞)은 둔포리(屯浦里. 된개)에서 도원리(挑源里)로 개명되던 당시 1768년 중장리(中障里)로 분향(分鄕) 독립되었음.
    그러나 이 시기의 좌기동(坐起洞)과 평지동(平地洞) 지역은 모동장(毛洞場) 우장(牛場)으로 지정된 초기였으므로 목감(牧監) 또는 목자(牧子)들만이 기거하였으며 취락(聚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1830년경으로 되어 있음.
    관할상(管轄上)으로 보면 1826년 중장리(中障里)를 인향리(仁鄕里)로 리명(里名)을 개칭할 당시까지 도원리(挑源里)에 입적(入籍)되어 있었다가 1910년 국유(國有) 목장(牧場)을 민유(民有)로 이관(移管)된 후인 1914년 일본인에 의한 세부 측량 결과로 3개동 전지역이 무릉경(武陵境)으로 귀속되었으며 사기수(蛇起首)를 좌기동(坐起洞)으로 고바치를 평지동(平地洞)으로 인향리(仁鄕里)를 인향동(仁鄕洞)으로 각각 개칭됨과 동시에 행정상 무릉(武陵) 상동(上洞)으로 편제되어 현 무릉 1리에서 제반 사무를 관장하여 오다가 인구증가에 따른 업무의 과다로 비능률적 행정의 불합리성을 고려 1920년 무릉 1, 2리로 분할하게 되었음.
    각 동(洞)의 설촌(設村) 초기 이주경로를 보면 인향동(仁鄕洞)에는 모관지역인 한경면(翰京面)과 한림읍(翰林邑)에서 대부분 이주하였고, 좌기동(坐起洞)은 대정(大靜)고을에서, 그리고 평지동(平地洞)은 한경(翰京)과 모슬포 등지에서 이주하여 전거지(前居地)가 각기 달랐으므로 세시풍습(歲時風習)도 현저하게 다름을 엿볼수 있었으나 현대문명의 확산으로 특이한 면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음.

    가. 인향동(仁鄕洞)

    (1) 취락(聚落) 이전(以前)의 환경(環境)

    한라산 수림지대가 인향동(仁鄕洞) 동부지역까지 연결되어 있던 500여년 전 원시림(原始林)이 울창(鬱蒼)하여 있었으며 서북부 지역은 점토지대(粘土地帶)가 방대하게 형성되어 수림과 점토가 풍부하였음.
    이러한 자연적 천혜의 조건을 이용하여 숯을 굽기 위한 서민(庶民), 관속(官屬), 사리(使吏)들이 밀림지대(密林地帶)에 기거하였고 점토지대에는 개와(蓋瓦), 도기(陶器) 등을 목적으로 초막을 구축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원시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추측됨.
    확실한 연대는 알수없으나 약 500여년 전 제작된 개와(蓋瓦)를 대정(大靜), 정의현(旌義縣) 일원의 관아에 납품하였던 것으로 구전되며 숯 역시 진상하였다고 한다. 기거지(寄居地)를 중심으로 산재한 방묘(方墓)가 된 기 시기의 연대를 입증하고 있음.

    (2) 설촌(設村)

    (가) 서기 1768년 신도(新挑)에서 분향(分鄕)과 동시에 양씨(梁氏)와 김씨(金氏)가 지금의 산양경(山陽境, 2859번지) 속칭 양풍헌(梁風憲) 올래에 이주하면서 중장리(中障里) 또는 인행리(人行里)로 호칭하였음.
    (나) 1826년 12월 명월리(明月里)에 거주하던 향교도훈장(鄕校都訓長) 양기석(梁基錫), 변풍헌(邊風憲), 김훈장(金訓長) 등 제씨(諸氏)와 귀덕리(歸德里)가 고향인 문정복(文廷福), 문달민(文達敏) 종형제(從兄弟)가 서동이(西洞伊)에 거주 1844년 제주시 도련동(道連洞) 봉개(奉蓋)에서 제장(齊長) 양학부(梁學富)씨 3부자(父子)가 입주하였는데 생활이 빈궁한 양학부(梁學富)의 차남 지관(智寬)씨를 양기석(梁基錫)씨의 승계자(承繼者)로 수양(受養)하므로써 양(兩) 양씨가문(梁氏家門)이 인향리(仁鄕里) 양씨(梁氏) 일문(一門)이 되었으며 그와 같은 시기에 청수리(淸水里) 유향좌수(留鄕座首) 이치방(李致芳)씨 전거지(前居地) 월림(月林)인 유향좌수(留鄕座首) 김명례(金明禮), 김명홍(金明弘)씨가 서골목(西骨穆)에 입주함. 김명집(金明集) 3형제와 동광(東廣)에서 강응록(姜應祿)씨를 비롯하여 1868년에는 저지리(楮旨里) 출신 통정대부(通政大夫) 고행규(高行圭)씨 3부자(父子)와 훈장(訓長) 김흥(金興)씨가 이주함.
    (다) 1851년과 1854년 목사(牧使)로부터 효자(孝子), 충효(忠孝) 완문(完文)을 받으면서 인향리(仁鄕里)로 개칭하고 도원리(挑源里)에 입적(入籍)하였으며 동년 안덕면(安德面) 덕수리(德修里)에서 송문환(宋文煥)씨가 입주함.
    (라) 1858년 속칭 [불칸밭] 일대에 명월리(明月里) 출신 좌수(座首) 김종익(金宗益)씨 부자(父子)와 신평리(新坪里) 출신 훈장(訓長) 현행규(玄行奎)와 전거지(前居地) 불명(不明)인 고중석(高仲石)씨가 입주함.
    (마) 같은 시기에 속칭 [東骨穆]에 저지리(楮旨里) 출신 유향별감(留鄕別監) 홍리규(洪利奎)씨와 전거지(前居地) 불명(不明) 강생원(姜生員), 신평(新坪)에서 제장(齊長) 송신열(宋信列)씨, 박정봉(朴丁奉)씨, 월림(月林)에서 현행관(玄行寬) 부자(父子)가 입주함.
    (바) 1870년 '협산이(協山伊)'에 고경생(高庚生) 선조(先祖)가 최초로 입주한 것을 비롯하여 판포(板浦)에서 별장(別掌) 차한복(車漢福), 신평리(新坪里) 유향별감(留鄕別監) 현행표(玄行杓), 약천(藥泉)에서 송문평(宋文平)씨, 사계(沙溪)에서 강만춘(姜晩春)씨가 입주함.
    (사) 1875년 [구남물목]에는 약천리(藥泉里) 송시영(宋時榮)씨와 종질(從姪) 송안국(宋安國)씨를 비롯하여 판포리(板浦里) 김형범(金衡範)씨 선친(先親)이 입주하고, 청수리(淸水里)에서 이주한 김갑천(金甲千)씨는 무후(無後)했으므로 조수리(造水里) 거주 김기방(金基邦)씨가 승계 [구남물목]에 이주함. 또한 청수(淸水) 강달영(姜達永)씨가 입주하였으며 저지(楮旨)에서 김재옥(金才玉)씨가 이주함.
    이상과 같이 오늘의 인향동(仁鄕洞)이 설촌(設村)되기 까지는 100여년의 연륜과 각기 다른 10여 성씨(姓氏)가 주로 모관지역에서 입주한 것으로 나타났음. 대가족(大家族)으로 성장하면서 지금의 [왕?목(王?穆)] [구나물동산]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게 되었음.

    나. 좌기동(坐起洞)

    1830년경 대정골(보성)에 거주하던 김원식(金元寔. 김대길 5대조부)와 김용홍(金龍弘. 김만평 증조부)씨를 비롯 하모리 출신 강계염(姜繼炎. 강한표 증조부)씨, 대정좌면(大靜左面. 구 중문면) 대포리(大浦里) 고한사(高漢泗. 고종범 증조부)씨 등이 계속 이주해 옴으로써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개발도 활발하여 갔으며 농토가 비옥하고 광활하여 사람살기가 좋다는 소문이 주위로 파급됨에 따라 10여년 어간(於間) 30여 세대가 입주하여 동세(洞勢)가 확장되어갔음.
    다. 평지동(平地洞)
    취락이 형성되기 이전인 1750년경(영조 26년) 가파목장(加派牧場)과 함께 목장으로 지정 소를 방목하였으므로 목감(牧監), 군두(群頭), 목자(牧子)들이 상주하였음. 이로부터 100여년 뒤인 1830년경 비로소 외지에서 이민(移民)들이 이주를 시작하였는데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설촌의 경위를 살펴보면,
    1850년경 강풍헌(姜風憲. 박태인 외조부) 한림읍(翰林邑) 한수리(漢洙里)에서 거주하다가 영락(永樂)을 거쳐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강풍헌씨는 개장 당시 장감(場監)이었다는 고증으로 미루어 보아 청년시절부터 목자(牧子) 군두(群頭)의 직을 거쳐 장감(場監)이 된 것으로 추측되며 1900년경 모동장(毛洞場)이 폐장(閉場)되어 7소장(所場)으로 이장(移場)될 때 하사받은 황색바탕에 흰점이 박힌 얼룩소 1두를 박옥비(박태인 누나)가 10살 때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음.
    1853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가 14세의 어린 나이로 한경면(翰京面) 판포리(板浦里. 널개)에서 이곳에 살기 위하여 찾아왔으나 인적이 별로 없는 목장지였으므로 영락리(永樂里) 외소낭 동네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당시 2세대 거주) 20세까지 거주하다가 가파목장의 폐장으로 모동장(毛洞場)에 흑우(黑牛)가 합둔(合屯)된지 15년후인 1859년 이곳에 이주하였는데 이때에는 3, 4세대가 이미 정착되어 있었다고 함. 여산(礪山) 송태수(곤물 송장의)가 안덕면(安德面) 화순리(和順里) 웃부락(곤물동네)에서 입주함.

    구장(區長)을 역임한 김해(金海) 金해만씨 부친(김창규)이 모슬포에서 입주하였으며
    김해(金海) 金상추(金常秋) 증조(曾祖)가 한경면(翰京面) 고산(高山)에서 입주
    여산(礪山) 宋기봉(宋起鳳) 조부가 동일리(東日里. 날레)에서 이주하여 왔는데 당시 7세대가 기거한 것으로 전함.
    경주(慶州) 金경옥 조부와 고부(古阜) 이시휴(李時休) 증조(曾祖)가 모슬포에서 입주하였으며
    풍천(豊川) 任영기 조부가 한경면(翰京面) 저지리(楮旨里)에서 이주하였고,
    경주(慶州) 김주문(金珠文) 증조가 좌기동(坐起洞) 웃동네에 (여길이동산) 1870년경 정착 기거하다가 별세하였으며 기후대(其後代) 주문씨 조부 석지(錫之) 옹이 이곳으로 입주하였음.
    남양(南陽) 홍장의(洪掌議. 홍기호씨 증조)가 애월읍(涯月邑) 화전(火田)에서 1900년 초에 이주하였고,
    김해(金海) 金승옥 조부를 비롯 남평(南平) 문용운 조부, 제주(濟州) 고성규 조부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입주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한일합병을 전후하여 대거 이주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음.